한반도평화

복합안보 시대, 한반도 평화는 어디로 가야 하나

백인주 2026. 8. 29. 14:43

억지와 대화 사이를 넘어 ‘회복력 있는 평화’로

한반도 안보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다.

핵무기는 여전히 한국의 생존과 직결된 위협이며, 이에 대한 억지와 방어태세는 평화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그러나 북핵만으로 오늘의 한반도 안보를 설명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복잡해졌다.

 

위협은 미사일 발사대에서만 오지 않는다.

원격근무를 가장한 IT 인력의 위장 취업, AI를 활용한 사이버 침투와 허위정보, 에너지와 공급망의 불안, 북러 간 군사·산업 협력, 해상교통로를 둘러싼 긴장, 인도태평양 전략의 변화가 서로 얽혀 있다. 한반도의 안보는 군사분계선 주변의 대치만이 아니라 서버와 항만, 전력망과 물류망, 공공기관과 시민의 일상으로까지 확장됐다.

 

미국기업연구소(AEI)와 전쟁연구소(ISW)가 8월 19일 공개한 「Korean Peninsula Update」는 이러한 변화를 집약해 보여 준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활동만이 아니라 북러 협력, 북한 IT 인력과 AI·사이버 활동, 해군력 증강, 한미연합훈련, 주한미군의 인도태평양 역할을 한꺼번에 다룬다. 보고서의 기본 시각은 미국의 억지와 동맹 중심 프레임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 안보의 범위가 이미 군사 영역을 넘어섰다는 문제의식은 귀담아들을 만하다.[aei]

 

그렇다면 복합안보의 시대에 한반도 평화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억지와 대화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핵위협을 막을 억지력을 갖추면서도 우발적 충돌을 줄이고, 사회의 취약성을 낮추며, 단절된 관계 속에서도 최소한의 소통 통로를 남겨 두는 데 있다. 평화는 안보의 반대말이 아니다. 평화는 가장 넓고 현실적인 안보의 이름이어야 한다.

핵 억지는 평화의 출발점이다

핵과 미사일의 위협 앞에서 군사적 억지를 빼놓고 평화를 말할 수는 없다. 한국군의 방어 역량, 한미동맹, 정보·감시·정찰 체계, 미사일 방어,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재난·민방위 체계는 모두 전쟁을 막기 위한 기반이다. 어떤 도발도 성공하기 어렵고, 전쟁을 선택해도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을 상대에게 분명하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AEI·ISW 보고서는 북한이 8월 6일과 12일 연이어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이전과 달리 북한 매체가 이를 공식 보도하지 않은 점에 주목한다. 보고서는 8월 12일 미사일이 약 690~700km를 비행했고 정점고도는 약 90km였다는 한국 합참과 일본 방위성 발표을 인용하며, 북한이 기존 단거리탄도미사일과 중거리탄도미사일 사이의 범주에 놓일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시험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aei]

 

보고서의 분석이 맞는지와 별개로, 여기서 읽어야 할 점은 북한의 위협이 단순히 “몇 발을 발사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양한 사거리와 궤적, 정밀도, 발사 플랫폼을 조합해 상대의 탐지·요격·대응 판단을 복잡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핵과 재래식 무기의 경계가 흐려질수록, 위기 상황에서 오판의 위험도 커진다.

 

그래서 억지는 필요하다. 다만 억지의 목적은 상대를 모욕하거나 대결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다. 억지는 전쟁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여야 한다. 강한 방어태세는 긴장을 영구히 높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긴장이 전쟁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여야 한다.

평화는 억지의 부재가 아니다. 평화는 억지가 전쟁 방지라는 목적을 잃지 않을 때 가능해진다.

신뢰가 없기에 위기관리 장치가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누군가가 처음부터 전면전을 계획하는 경우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벌어진 작은 충돌, 잘못된 정보, 통신 장애, 과잉 대응, 사이버 교란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위기가 확대되는 상황도 충분히 현실적이다.

 

북한의 핵 운용 방식 변화 가능성은 이 위험을 더 키운다. 보고서는 북한이 전방 포병부대에 화성-11형 전술탄도미사일과 600mm 방사포 등 핵 탑재가 가능한 체계를 재래식 포병과 함께 배치하고 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북한이 핵무기 사용 권한을 보다 분산하는 지휘통제 체계를 발전시키고, 전방 지역에 핵 운반 수단을 배치한다면 국지적 충돌이 핵 위험과 더 빨리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우려다.[aei]

 

이것이 곧 전쟁이 임박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작은 사건이 큰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를 더 촘촘히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군 통신선과 비상 연락망은 언제든 작동할 수 있도록 유지하거나 복원할 준비가 필요하다. 해상과 공중에서 우발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행동규칙도 마련돼야 한다. 대규모 훈련, 미사일 발사, 재난 상황처럼 상대가 위협으로 오인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가능한 범위의 사전 통보와 사실 확인이 중요하다. 직접적인 남북 소통이 어렵다면 국제기구나 제3국을 통한 비상 연락 채널도 검토할 수 있다.

 

이런 장치는 화해가 이뤄진 뒤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화해가 멀기 때문에 더 필요하다.

신뢰가 충분해서 연락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신뢰가 없기 때문에 연락선이 필요하다. 위기관리 장치는 화해의 보상이 아니라 충돌을 막기 위한 보험이다.

서버로 들어오는 위협에 대비해야 한다

복합안보 시대의 가장 큰 변화는 전선이 디지털 공간으로 넓어졌다는 점이다. 금융과 통신, 전력과 교통, 의료와 행정은 모두 네트워크 위에서 작동한다. 공격자는 미사일을 쏘지 않아도 사회의 핵심 기능을 흔들 수 있다.

 

AEI·ISW 보고서는 북한의 사이버 활동이 기업의 자산 탈취나 정보 절취를 넘어 미국 연방기관 시스템 침투 가능성까지 넓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보고서가 인용한 FBI 관계자 발언에 따르면, 북한 원격 IT 인력이 미국 연방기관에 고용된 사례가 확인됐고, 북한 연계 IT 인력이 AI를 작전에 활용했다는 정황도 제시됐다. 또 미국 법무부 발표을 인용해 중국에 기반을 둔 북한 IT 인력이 미국 연방항공청 관련 소프트웨어 계약에 참여했고, 적어도 13개 미국 기관과 계약을 맺어 민감한 정부 시스템에 원격 접근했다는 사례도 소개한다.[aei]

 

이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도 원격근무, 외주 개발, 클라우드 전환, 디지털 행정, 민간 플랫폼 의존도가 빠르게 커진 사회다. 하나의 위장 채용, 보안 관리가 취약한 협력업체, 탈취된 계정 하나가 더 큰 시스템 전체의 취약점이 될 수 있다.

AI는 이 위험을 더 정교하게 만든다. 사람의 얼굴·음성·말투를 흉내 내는 딥페이크, 실제 조직의 공문처럼 보이는 피싱 메일, 자동화된 허위정보 유포는 기술적 보안만으로 막기 어렵다. 시민의 판단력, 기업의 채용·조달 절차, 공공기관의 외주 관리, 플랫폼의 책임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평화의 기반에는 디지털 회복력이 포함돼야 한다.

공격을 예방하는 것만큼, 공격을 받아도 금융·의료·행정·통신 서비스가 멈추지 않고 빠르게 복구되도록 설계하는 일이 중요하다.

현대의 평화는 국경을 지키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의 데이터와 공공 시스템, 사회가 사실을 판단하는 능력을 지키는 일도 평화의 일부다.

북러 협력의 ‘기반’을 봐야 한다

북러 협력도 한반도 평화에 새로운 변수다. 흔히 무기와 포탄, 병력 지원에만 주목하지만, 더 긴 시야에서는 에너지·산업·노동·물류 기반의 변화가 중요하다.

 

보고서는 익명의 우크라이나 정보원을 인용한 교도통신 보도를 바탕으로, 러시아가 북한에 연간 30만 톤의 항공유와 경유를 생산할 수 있는 정유시설 건설을 지원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가 북한에서 연간 2만5천 톤의 석유제품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다만 이는 익명 정보원을 인용한 언론 보도에 기반한 분석이므로, 독립적으로 확인된 사실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aei]

 

그럼에도 이 가능성이 던지는 질문은 중요하다. 북러 관계가 단기적인 군수품 교환을 넘어 북한의 에너지·산업 기반을 보완하는 장기적 협력으로 발전한다면, 북한의 군사 능력뿐 아니라 경제적 버티기 능력과 협상 환경도 달라질 수 있다.

 

에너지는 경제의 혈관이다. 공장과 철도, 통신망과 군수 생산은 안정적인 에너지 없이는 유지되기 어렵다. 한국의 안보 분석도 북한이 보유한 무기의 수량뿐 아니라, 그 무기를 생산·운용·보충하게 하는 에너지와 산업, 기술과 노동의 연결망을 함께 봐야 한다.

안보는 적의 무기만 세는 일이 아니다. 그 무기를 지속시키는 에너지, 산업, 기술, 노동의 기반까지 읽는 일이다.

 

북러 협력의 확대는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동시에 한국에는 더 정교한 외교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재의 실효성을 점검하고, 국제사회와 정보를 공유하며, 북러 협력이 지역의 불안정성을 키우지 않도록 외교적 압박과 협상 공간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동맹의 확장과 평화의 자율성

한반도 안보의 범위가 넓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의 동맹 환경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2026년 UFS 훈련이 한반도 유사시 대비를 넘어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미 제8군은 훈련이 동북아 안보 환경 조성과 육군 사전배치물자 운용·신속 전개 능력을 포함한다고 밝혔고, 보고서는 이를 제1도련선 내 억지 전략과 연계해 해석한다. 또 주한미군이 한국을 미군 자산의 정비·수리·분해정비를 지원하는 ‘지역 지속지원 허브’로 활용하는 구상을 검토해 왔다고 전한다.[aei]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분명 커지고 있다. 제조업과 조선업, 반도체와 첨단기술, 항만과 물류 역량을 가진 한국은 단순한 전방 방어선 이상의 역할을 요구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략적 가치의 증대가 자동으로 선택권의 확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도태평양의 긴장, 대만해협과 남중국해, 중동의 해상교통로와 공급망 문제가 한반도 안보와 결합할수록 한국은 더 많은 선택을 요구받을 수 있다. 어떤 역외 작전에, 어느 수준까지, 어떤 원칙과 절차로 참여할 것인가. 그 비용과 위험은 누가 감당하며, 국회와 시민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동맹은 한국 안보의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동맹의 역할이 넓어질수록 한국의 외교적 자율성, 민주적 통제, 국민적 합의도 함께 강화돼야 한다. 평화정책은 동맹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동맹의 힘이 한반도의 위기관리와 시민의 안전에 기여하도록 방향을 설계하는 일이어야 한다.

평화는 사회 전체의 회복력이다

복합안보 시대의 평화는 한 번의 정상회담이나 어느 한 부처의 정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핵과 미사일에는 억지력과 외교가 필요하다. 사이버 위협에는 공공기관과 기업의 보안, 디지털 행정의 회복력이 필요하다. 에너지 불안에는 공급망 다변화와 산업 기반이 필요하다. 기후·재난 위험에는 지방정부와 보건기관, 과학기술계의 준비가 필요하다. 북러 협력과 인도태평양의 지정학적 변화에는 냉정한 분석과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 = 핵 억지 + 위기관리 + 디지털 회복력 + 에너지·공급망 안정 + 인간안보 + 대화의 통로

 

이 식에서 어느 하나만 빠져도 평화는 취약해진다. 군사력이 강해도 사회가 사이버 공격에 무방비라면 안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화의 의지만 있고 위기관리 장치가 없다면 작은 충돌은 큰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 경제 규모가 커도 에너지와 공급망이 취약하다면 국가의 선택지는 줄어든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위협을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다.

핵과 미사일, 사이버와 AI, 에너지와 공급망, 기후와 재난으로 복잡해진 위협을 더 정확히 보자는 뜻이다.

 

한국은 핵을 억지할 힘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작은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게 할 위기관리 장치를 준비해야 한다. 공공 시스템과 시민의 데이터를 보호할 디지털 역량을 키워야 하며, 에너지·산업·공급망의 취약성을 낮춰야 한다. 남북관계가 어려운 때일수록 재난·보건·환경·인도주의 영역에서 미래의 협력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평화는 전쟁이 나지 않는 우연이 아니다. 억지와 대화, 기술과 제도, 국가 역량과 시민의 참여가 함께 만들어 내는 결과다. 복합위협의 시대에 한반도 평화는 더 넓고, 더 정교하고, 더 현실적인 안보가 되어야 한다.